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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국회의원+재벌 父의 늦둥이" 남진, 어떻게 전설이 됐나 [★FULL인터뷰]

  • 김나라 기자
  • 2024-09-07
'영원한 오빠' 가수 남진(본명 김남진·78)이 '세기의 라이벌' 나훈아(본명 최홍기·77)의 은퇴 선언을 아쉬워하며, 무대에 대한 변함없이 뜨거운 열의를 엿보게 했다.

남진은 앞서 4일 다큐멘터리 영화 '오빠, 남진'(감독 정인성)으로 극장가의 문을 두드렸다.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팬덤을 이끈 '오빠' 남진의 데뷔 60주년 기념, 오직 팬들을 위한 헌정 무비다. 1965년 데뷔해 올해 60주년을 맞이한 남진의 데뷔시절부터 현재까지, 대중음악을 넘어 대한민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그의 인생을 확인할 수 있다.

남진은 데뷔곡 '서울 플레이 보이'를 발매한 뒤 '가슴 아프게'(1967)로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 1971년부터 1973년까지 3년 연속 '가수왕'에 선정되며 큰 성공을 맛봤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약 70여 편의 영화 주연 배우로 활약, '대한민국 최고의 톱스타'로 떠올랐다. 무려 4만 명이 넘는 소녀팬들을 거느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오빠'로 불린 남진. 아티스트로서 탄탄대로의 길을 걷는 듯했지만 조직폭력배에게 당한 칼부림 피해 사건, 정치적 세력에 연루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는 등 굴곡진 삶을 살게 된다. 또 영화엔 인기 절정이던 1968년 해병대에 자원입대, 이듬해 모 신문사 회장 딸의 생일파티 초대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월남전(베트남 전쟁) 전투병으로 파병됐던 뒷이야기도 담겼다. 해당 신문사의 보복성 기사를 잠재우기 위한 해병대 측의 결정이었지만, 1년 복무 연장을 자처하여 총 24개월 동안 참전한 건 남진의 뜻이었다.

더불어 '세기의 라이벌' 나훈아의 등장을 비롯해 인기 침체기를 겪으며 미국행을 결정, 이후 복귀하기까지 과정을 되짚는다. "팬들이 찾아주지 않으면 내가 찾아가겠다"라고 말한 남진은 어려움 속에서도 다시금 일어설 수 있었던 계기 등 '오빠, 남진'에 솔직한 소회를 풀어냈다.
남진은 최근 스타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오빠, 남진'에 대해 "나도 깜빡했던 나를 돌아보는 기회가 처음으로 생겼다. 보면서 감동했고 웃음이 났다. 60년 전이니 얼마나 싱싱했겠나(웃음). 과일로 말하자면 '풋사과'처럼 귀엽더라"라며 "60년 (가수 활동을) 하고 보니 정말 큰 행운이고 축복이구나 싶더라. 본인의 노력은 당연한 것이고 무엇보다 많은 팬의 사랑과 투혼이 있어서 오늘도 내가 이렇게 활동을 하고 있구나, 새삼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라고 남다른 의미를 강조했다.

특히 남진은 "난 노력에 비해 행운 때문에 스타가 됐다"라는 지나친 겸손함으로 '롱런'할 수밖에 없는 비결을 확인케 했다. 그는 "가요에 '가'자도 모르는 놈이 가수가 된 건 대한민국에 나밖에 없다. 다들 가요 하다가 이 바닥에 온 거라, 난 그만큼 행운이 많은 사람이라는 거다. 나는 우리나라가 어려운 시절인 1950년, 60년대에도 부모 잘 만나 좋은 수저로 살아서 고생도 한 번 안 해본 놈 아니겠나"라고 스스로를 낮췄다.

남진 부친인 故(고) 김문옥은 생전 목포일보 발행인을 비롯해 제재소, 정미소, 양조장 등을 경영한 거부이자 목포상공회의소 회장, 대한유지생산업자회 회장을 역임했고 제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남진은 "국회의원, 신문사 회장 등을 지낸 재벌 아버지가 50세에 낳은 늦둥이 장남으로 태어나 세상을 잘 몰랐다. 고생을 안 해본 새끼라, 그러고 가수가 되고 스타가 됐으니 노래에 깊은 맛이 없었다. 다른 사람보다 쉽게 된 만큼 더 열심히 해야 했는데 그런 걸 잘 모르고 지나왔다. 전문적으로 더 파고들어 피 눈물이 나는 노력이 있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전성기 때) 감사함을 제대로 보답을 못했구나, 무명 고생을 안 해서 이걸 모르고 살아온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이를 회복하는 길은 노력밖에 없다 싶어서, 미국에서 돌아와 복귀했을 당시 '다시 신인으로 돌아가자' 했다.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무언가 강한 압박감이 들어서 (침체기에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게 된 거다. 저는 이렇게 후에 나이를 먹으면서 열정을 갖게 됐다"라고 본받을 만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60년 전 히트한 노래들을 다시 불러보고 싶다. 그냥 인기 가수로서가 아니라 내 노래이지만 감성을 느끼면서, 진짜 가수로서 부르고 싶다. 그 진정성을 찾으려고 지금도 노래하고 있는 거다"라고 누구보다 진심인 마음을 전했다.

팬들을 향한 애틋함을 표하기도. 남진은 "10대 소녀들이 이제 70대가 됐다. 제 팬들 중에 어린 분이라고 하면 60대이다. 그런 세월을 함께 와줘서 정말 고맙죠. 그래서 지금은 팬분들을 만나는 게 아니라 진짜 친척, 가족 같은 느낌이 든다. 무대에서 노래할 때 보면 팬들의 표정은 옛날로 돌아가 있다. 거기에 굉장한 감동을 느낀다"라고 밝혔다.
또한 남진은 자신의 가수 인생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 '라이벌' 나훈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나훈아는 타고난 가수"라며 높이 샀다.

시대를 풍미했던 나훈아와의 라이벌 구도에 대해선 어떤 생각일까. 이에 대해 남진은 "흥행상의 이유로, 돈 벌어먹는 사람들이 만들어준 거다. 당연히 돈을 벌어야 하니, 일종의 '연예계 비즈니스'인 것"이라며 "미디어, 그리고 대중을 통해 우리의 '라이벌 시대'가 만들어진 건데 그럼 또 해줘야지. 쉽게 말해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라이벌이 됐다. 이런 라이벌 구도는 우리밖에 없다. 태진아-송대관은 자기네들이 억지로 (라이벌 구도를) 만든 거고, 우린 시대가 만들어줬다는 점에서 다르다는 거다. 덕분에 두 가수가 전성기를 이뤘고, 우리에게도 1970년대 가요계에도 황금기를 안겨줬다"라고 짚었다.

이어 남진은 "나훈아는 한참 후배이고, 내 친구 제자이기도 하다. 나는 1968년 해병대 입대할 때, 나훈아는 고등학생이었을 때 처음 봤다"라고 첫 만남을 떠올리며 "워낙 개성이 강한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남진은 나훈아의 '은퇴' 선언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제 솔직한 마음은 '(은퇴 선언을) 왜 했지?'다. 글쎄, 전혀 이해가 안 가지. 나이를 먹었다든가 다쳤다든가 입원을 했다든가, 입원했더라도 뭐 나으면 되는 건데. 진짜 왜 그런 건지 싶다"라고 터놓았다.
그렇다면 남진 본인은 '은퇴'에 대해 어떤 생각일까. 그는 "'관둬야지'라든가 '마지막 무대'에 관한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은퇴 공연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노래가 안 되면 떠날 거다. 하지만 되는데 떠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재즈 가수 故 토니 베넷이 96세까지 노래를 부르고 은퇴했는데 치매에 걸렸는데도 마지막 무대에서 음정, 박자, 가사 다 하나도 안 틀리고 전성기 때랑 똑같이 열창했다.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할 정도로 아름답더라. 물론, 쉽지 않겠지만 토니 베넷처럼 관두고 싶다"라는 바람을 얘기했다.

남진은 노래의 의미를 묻는 말에 "계속 바뀐다. 좋아서 시작했고 흥이 나서 불렀다가 세월이 지나가면서는 '노래가 나의 삶이구나, 나의 인생이구나' 싶었다. 이 나이에 와서야 내 전부가 '노래'라는 걸 알게 됐다. 처음엔 몰랐다"라고 답하는 어쩔 수 없는 '천생 가수'다. 그는 "대중가수니까 아무래도 대중에게 불려져야 하는 히트곡이 중요하겠지만 정말 멋있는 가수, 제 영혼이 나올 수 있는 멜로디의 노래를 만나고 싶다. 그 노래 안에서 살다가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이제는 한 곡이라도 그런 곡을 남기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다"라며 먹먹함마저 자아냈다.
김나라 기자 | kimcountry@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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