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전, 작은 소녀였던 가수 윤하(35·고윤하)는 한국을 떠났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과감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가요계에 발을 들인 윤하는 이제 모두가 인정하는 아티스트로 성장했다.
스타뉴스는 창간 19주년을 맞아 윤하와 만나 인터뷰했다.
윤하는 스타뉴스와 같은 시간을 걸어왔다. 그는 2004년 일본에서 데뷔한 이후 올해 19주년을 맞이했다. 이에 윤하는 "'창간 19주년'이란 말을 들었을 때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같은 타임라인을 가는 존재가 있다는 점에서 힘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도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동료들을 오다가다 만나면 여러 생각이 들더라. 걸 그룹 카라가 재결합해 활동하기도 했고 가수 케이윌, 밴드 FT아일랜드 등도 만났다.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어 좋았고, 함께 생존한 동료들이 반가웠던 거 같다"고 덧붙였다.
윤하는 빠르게 지나는 시간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아직도 20대인 줄 안다"며 소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그는 "어른들이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 실감 나지 않는다'고 하면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공감도 되고 많은 생각도 든다. '선배들이 참 외로웠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제야 주변을 둘러보는 시기가 된 거 같다. 스태프나 동료, 선배, 후배를 돌아보게 된다. 이전에는 나의 성장에만 몰두한 느낌인데 이제는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고 고백했다.
흐르는 시간 안에서 윤하는 참 많은 순간을 겪었다. 그는 19년 전 일본에서 데뷔하게 된 이유를 묻자 "한국에서 데뷔가 안 돼서 넘어간 거다. 한국 회사 오디션에선 다 떨어졌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당시 윤하의 음악은 비주류에 해당했다고. 댄스 음악이 주를 이루던 한국 가요계에서 '록 키드'(Rock Kid)였던 윤하는 환영받지 못했다.
일본 생활도 녹록지는 않았다고. 윤하는 "사실 그땐 뭘 몰랐다. 어른들의 생각을 읽지도 못했다. 또 문화적인 차별이라기보단 어리고 외국인이란 점에서 차별받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것도 아니었다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지 못했고, 사고 싶은 걸 사지 못했다고 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윤하의 음악은 강한 힘을 발휘했다. 특히 2006년에 발매한 '호오키보시'(혜성)가 오리콘 일간 싱글차트 상위권에 진입하며 ,윤하는 '오리콘 혜성'이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윤하의 일본 내 인기는 여전하다. 그는 지난 4월 8일 일본 FC LIVE TOKYO에서 데뷔 후 첫 일본 팬미팅인 '2023 윤하 홀릭스 팬미팅 인 재팬'(2023 YOUNHA Y HOLICS FANMEETING in JAPAN)을 열고 현지 팬들을 만났다.
일본에서 혜성처럼 등장했던 윤하에게는 '한국 데뷔'의 기회도 찾아왔다. 바로 2005년 KBS 1TV 교양 프로그램 '인간극장'에서 '소녀 윤하, 도쿄를 사로잡다' 편이 방송되면서부터다. 해외에서 '열일'한 소녀 윤하는 한국 팬들의 높은 관심과 성원을 받았다. 쏟아지는 러브콜에 윤하는 "가수 보아 선배처럼 양국 간의 교류를 이끄나 싶었다.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말 그대로 윤하는 한국으로 '금의환향'했다. 2007년 국내에서 첫 정규 앨범 '고백하기 좋은 날'을 발매하고 타이틀곡 '비밀번호 486'으로 활동했다. '비밀번호 486'는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윤하의 대표곡 중 하나다.
그러나 흥행과 별개로 한국 가요계 문화에 충격을 받기도 했단다. 그는 "일본에서는 음악 프로그램에 나가면 아티스트도 (연출진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촬영이 끝나고 나면 퍼포먼스를 칭찬해 주는가 하면, '고생했다'며 선물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선후배 관계가 엄격하고 군대식 문화가 있었다. 지금은 그런 문화가 사라진 거 같은데 그때는 그랬다"고 고백했다.
이어 "당시엔 그냥 혼란스러웠다. '내가 정립해 온 생각들이 틀렸나' 싶기도 했다. 문화가 주는 힘이라는 게 정말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 유대 안에 들어가는 게 힘들기도 했다"고 부연했다.
-인터뷰②에 이어
최혜진 기자
| hj_622@mtstarnews.com
스타뉴스는 창간 19주년을 맞아 윤하와 만나 인터뷰했다.
윤하는 스타뉴스와 같은 시간을 걸어왔다. 그는 2004년 일본에서 데뷔한 이후 올해 19주년을 맞이했다. 이에 윤하는 "'창간 19주년'이란 말을 들었을 때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같은 타임라인을 가는 존재가 있다는 점에서 힘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도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동료들을 오다가다 만나면 여러 생각이 들더라. 걸 그룹 카라가 재결합해 활동하기도 했고 가수 케이윌, 밴드 FT아일랜드 등도 만났다.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어 좋았고, 함께 생존한 동료들이 반가웠던 거 같다"고 덧붙였다.
윤하는 빠르게 지나는 시간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아직도 20대인 줄 안다"며 소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그는 "어른들이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 실감 나지 않는다'고 하면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공감도 되고 많은 생각도 든다. '선배들이 참 외로웠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제야 주변을 둘러보는 시기가 된 거 같다. 스태프나 동료, 선배, 후배를 돌아보게 된다. 이전에는 나의 성장에만 몰두한 느낌인데 이제는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고 고백했다.
흐르는 시간 안에서 윤하는 참 많은 순간을 겪었다. 그는 19년 전 일본에서 데뷔하게 된 이유를 묻자 "한국에서 데뷔가 안 돼서 넘어간 거다. 한국 회사 오디션에선 다 떨어졌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당시 윤하의 음악은 비주류에 해당했다고. 댄스 음악이 주를 이루던 한국 가요계에서 '록 키드'(Rock Kid)였던 윤하는 환영받지 못했다.
일본 생활도 녹록지는 않았다고. 윤하는 "사실 그땐 뭘 몰랐다. 어른들의 생각을 읽지도 못했다. 또 문화적인 차별이라기보단 어리고 외국인이란 점에서 차별받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것도 아니었다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지 못했고, 사고 싶은 걸 사지 못했다고 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윤하의 음악은 강한 힘을 발휘했다. 특히 2006년에 발매한 '호오키보시'(혜성)가 오리콘 일간 싱글차트 상위권에 진입하며 ,윤하는 '오리콘 혜성'이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윤하의 일본 내 인기는 여전하다. 그는 지난 4월 8일 일본 FC LIVE TOKYO에서 데뷔 후 첫 일본 팬미팅인 '2023 윤하 홀릭스 팬미팅 인 재팬'(2023 YOUNHA Y HOLICS FANMEETING in JAPAN)을 열고 현지 팬들을 만났다.
일본에서 혜성처럼 등장했던 윤하에게는 '한국 데뷔'의 기회도 찾아왔다. 바로 2005년 KBS 1TV 교양 프로그램 '인간극장'에서 '소녀 윤하, 도쿄를 사로잡다' 편이 방송되면서부터다. 해외에서 '열일'한 소녀 윤하는 한국 팬들의 높은 관심과 성원을 받았다. 쏟아지는 러브콜에 윤하는 "가수 보아 선배처럼 양국 간의 교류를 이끄나 싶었다.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말 그대로 윤하는 한국으로 '금의환향'했다. 2007년 국내에서 첫 정규 앨범 '고백하기 좋은 날'을 발매하고 타이틀곡 '비밀번호 486'으로 활동했다. '비밀번호 486'는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윤하의 대표곡 중 하나다.
그러나 흥행과 별개로 한국 가요계 문화에 충격을 받기도 했단다. 그는 "일본에서는 음악 프로그램에 나가면 아티스트도 (연출진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촬영이 끝나고 나면 퍼포먼스를 칭찬해 주는가 하면, '고생했다'며 선물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선후배 관계가 엄격하고 군대식 문화가 있었다. 지금은 그런 문화가 사라진 거 같은데 그때는 그랬다"고 고백했다.
이어 "당시엔 그냥 혼란스러웠다. '내가 정립해 온 생각들이 틀렸나' 싶기도 했다. 문화가 주는 힘이라는 게 정말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 유대 안에 들어가는 게 힘들기도 했다"고 부연했다.
-인터뷰②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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